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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Opinion)

퇴계 이황의 삶과 가르침"자성록"

by mo516 2014. 4. 29.

‘퇴계문선’은 동서문화사에서 ‘자성록’과 ‘언행록’ ‘성학십도’를 묶은 번역본(고산 옮김, 2008)이 읽을 만하다.

퇴계 이황(1501~1570) 70번이나 관직을 받고 이를 사양했다. 그는 관직에 있을 때는 늘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을 하며 조용히 지내고자 했다. 그가 ‘귀거래사’를 지은 도연명의 시와 삶을 좋아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였다. 그는 또한 ‘청백리’로 선정될 정도로 청렴한 관리였는데 50세가 되도록 집이 없었다고 그의 제자들이 쓴 ‘언행록’에 나와 있다. 그가 오직 관심을 두는 것은 학문을 하며 ‘착한 사람이 많이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제자를 가르칠 단칸의 서당이 있으면 더 바라지 않았다. 오십이 돼 마침내 한서암을 지어 거처로 삼았고, 51살 때인 1551년에는 계상서당을 지어 후학을 양성했다. 율곡 이이가 학문에 힘쓸 것을 맹서한 곳도 바로 계상서당이었다. 대학자 퇴계의 삶은 그가 남긴 저서와 언행들에서 다양한 인간적인 면모를 만날 수 있다.

먼저 ‘자성록’은 퇴계가 55~60세 때에 문인들에게 보낸 서간 가운데서 수양과 성찰에 도움이 되는 편지 22통을 모아 직접 편집한 책이다. 초학자들의 공통된 병을 고치는 요령, 학문하는 기본자세, 학문하는 방법, 명성을 가까이 하는 데 대한 경계 등 학문과 처세에 대한 퇴계의 깐깐한 생각들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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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이란 한 번 껑충 뛰어서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그러합니다. 또 이전에는 한두 해 만에 공부를 성취하기를 기약했다고 하셨으니, 만약 이처럼 마음을 먹었다면 참으로 터무니없다고 하겠습니다. 학문하는 일은 평생 사업이어서 비록 안자와 증자의 지위에 이를지라도 오히려 공부를 다 마쳤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니, 하물며 그 아랫사람에 있어서야 어떠하겠습니까.” 제자에게 보낸 이 편지글에 퇴계가 학문에 임하는 자세가 모두 드러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평생 독서에 힘쓰면서 더불어 ‘평생 사업’으로 제자를 가르쳤다. 그의 평생 사업은 재물을 많이 모으는 게 아니라 바로 ‘착한 사람이 많아지는 것’, 즉 ‘소원선인다(
所願善人多)’였다.

‘자성록’이 공자의 ‘가어(
家語)’에 해당한다면 퇴계의 제자들이 편찬한 ‘언행록’은 공자의 ‘논어’에 비유되기도 한다. 제자들이 그의 매화 향처럼 깨끗하고 고결한 품격을 담은 책이 ‘언행록’이다.

“신유년 겨울에 선생은 도산 완락재에서 거처하였다. 닭이 울면 일어나서 반드시 엄숙하게 어떤 글을 한 번 내리 외웠는데, 자세히 들어봤더니 ‘심경부주’였다.” 퇴계가 평생 학문의 근본으로 삼은 책은 ‘심경부주’와 ‘주자대전’이었는데 제자 김성일은 스승이 얼마나 ‘심경부주’에 심취했던가를 이렇게 전한다. 그는 배운 대로 실천하지 않고 입으로만 하는 학문을 특히 경계했다. 퇴계는 군자의 도는 부부생활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그래서 손자가 장가들 때에 “아내도 손님 대하듯 공경해야 한다”며 편지를 써 보냈다. 퇴계는 도산서당에 와서 공부하고 순천 집으로 돌아가는 천산재 이함형에게 편지를 써 준 적이 있었다. 제자가 부부 사이의 어려움을 자문한 데 따른 조언을 적은 글이었다. 퇴계는 “이 편지를 중간에서 읽지 말고 꼭 집 사립문 앞에서 읽고 곧바로 집으로 들어가게”라고 당부했다. 천산재는 선생이 시키는 대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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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재혼을 했으면서도 참으로 불행했네. 그렇지만 감히 처를 박대하려는 마음을 품어본 적이 없었으며, 잘 대접하려고 수십 년 동안 갖은 노력을 다했네. 때로는 마음이 흔들리고 번잡하여 참기 힘들고 민망할 때도 있었지만 어찌 정을 돌릴 수 있겠는가! 군자의 도는 부부생활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을.” 이 편지에는 퇴계 자신의 심경이 절절하게 토로돼 있다. 천산재는 좋은 남편으로 ‘회개’하고 부인을 소중히 여겼다. 퇴계가 세상을 떠나자 그 부인은 3년 동안 상복을 입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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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당은 터를 잡은 지 5년 만인 1561년에 암서헌과 완락재를 지어 완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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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혼자 완락재에서 잘 때인데, 한밤중에 일어나 창을 열고 앉았더니, 달은 밝고 별은 깨끗하며 강산은 텅 비어 조용하고 쓸쓸해서, 천지가 열리기 이전의 세계인 듯한 생각이 들었다.” 한밤중에 문득 깨어 달과 별을 보는 퇴계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필자는 지리산 종주를 할 때 세석산장에서 한밤중에 문득 깨었는데 농익게 타오르는 달빛에 취한 적이 있다
.

이황은 고봉 기대승(1527~1572)과의 편지로 ‘사단칠정론’에 대해 학문을 토론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559년부터 1566년까지 편지 왕래를 통해 7년간 계속된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 논쟁은 국내 학술 사상 유례없는 본격적인 학술 토론이었다. 처음 편지를 주고받을 때 퇴계는 나이 59세로 성균관 대사성(지금의 국립서울대 총장)이었고, 고봉은 갓 과거시험에 합격한 33세의 청년이었다. 26살의 나이 차이에도 두 사람은 나이와 세대, 직위와 경륜을 모두 뛰어넘어 편지를 주고받으며 학문을 토론했다. 이는 마치 당송팔대가인 구양수와 소동파를 연상케 한다. 구양수는 당대의 걸출한 시인인 소동파와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이 편지 모음집이 ‘구소수간(
歐蘇手簡)’이다. 세종대왕이 무려 1100번이나 읽었다고 한 바로 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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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에 즉위한 선조는 퇴계를 무척 좋아했다. 퇴계는 유교적 통치론을 선조가 쉽게 배울 수 있도록 열 폭의 도설(
圖說)을 만들어 올렸는데 그게 ‘성학십도’다. 성학, 즉 성군이 되기 위한 학문으로 열 가지 그림을 곁들여 병풍으로 엮은 것이다. 퇴계는 난해한 성리학 이론을 그림으로 단순화해 가시적으로 접근하게 해 어린 임금을 성군의 길로 이끌려 했던 것이다.

퇴계의 ‘무진육조소’와 ‘성학십도’는 바로 퇴계가 통치자의 수기치인(
修己治人)을 담아 성군의 길을 제시한 ‘동양판 군주론’이라고 할 수 있다. 퇴계의 군주론은 내 몸을 닦아 남을 교화한다는 수기치인에서 시작해 수기치인으로 끝난다. 이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 통치술을 강조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요즘 일본의 독도 도발과 ‘성노예’ 부인 등으로 한일 관계가 최악의 상태다. 왜구는 삼국시대부터 도발을 계속해왔는데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고 있다. 퇴계가 살던 시대에도 왜구는 국가적인 근심거리였다. 1545년 명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 쓰시마 도주로부터 전년에 왜구가 조선을 침입한 죄를 사죄하며 평화조약을 맺고 싶다는 의사표시가 있었다. 조정은 이를 거절했다. 이에 이황은 왜구에 대한 대책을 담아 ‘한낮의 태백성은 병란의 징조(
甲辰乞勿絶倭使疏)’라는 소를 올렸다. 이황이 상소에서 편 논리는 ‘왜는 야만이므로 야만은 야만을 대하는 법에 따라야 한다’는 획기적인 내용이었다. 이황은 중국의 예를 들며 “야만인은 비록 침략을 일삼는다고 하더라도 포용하는 게 상책”이라고 주장했다. 이적금수라는 말이 있듯이 왜구, 즉 오랑캐를 대할 때에는 오랑캐의 눈높이에 맞는 외교 정책을 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야만족 정책과 같이 조선도 예의를 모르는 야만족에게 예의를 들먹이는 것은 상책이 아니라고 퇴계는 조언했다. 당시 조정은 그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이로부터 47년 후 임진왜란이 발생했다.

퇴계는 도산에 돌아와서도 왜구의 창궐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 제자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남쪽 바다에 왜구의 흉한 기운이 날뛰니 나라가 장차 무엇으로써 이 캄캄한 밤의 한탄을 막아 낼 것인가 알 수 없다. 산골의 벽촌도 견딜 수 없겠거늘 하물며 나라 강토를 어찌하면 좋으냐.” 새삼 다시 ‘역사의 반복’을 떠올려본다.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비교문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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