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칼럼(Opinion)

진주가 온 뒤로 마을에 생기가 돌아

by mo516 2006. 2. 26.
“진주가 온 뒤로 마을에 생기가 돌아”
부녀회장 된 베트남 신부 오진주씨
싹싹하고 농사일·한국음식 잘해... 어른들 모두 `우리 며느리`라 불러

열아홉 살 비취가 100명의 신부 후보에 섞여 집에서 100㎞나 떨어진 호찌민(옛 사이공) 시내로 나가던 날 아침, 어머니 티 로(49)는 눈물을 쏟았다. “엄마, 왜 울고 그래. 내가 안 뽑힐지도 모르는데. 그냥 바람 쐬러 갔다 오는 거예요.” 어머니 티 로는 심장이 나빴다. 심장이식수술을 받아야 했지만 수술비를 마련할 길이 없었다. 비취의 할아버지는 큰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도박으로 다 탕진했다. 할아버지는 한때 4명의 아내와 함께 살았다. 아버지 치 용(52)은 할아버지를 경멸했지만 바람둥이 기질은 그대로 물려받았다. 대놓고 바람을 피웠고 술에 취해 들어온 날이면 어머니를 때렸다. 열다섯 살 되던 해에 비취는 초등학교를 중퇴했다. 아버지의 노름빚으로 땅도 소도 다 팔고 어머니마저 드러눕자 3녀 1남 중 맏딸인 비취가 사탕수수 농장에 나가야 했다.

최종 맞선자리. 비취는 한국에서 온 서른아홉 살의 김정기씨와 마주앉았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김씨는 스물다섯 살 되던 해에 오토바이 사고로 다리와 한쪽 눈을 다쳤다. 숱하게 선을 봤으나 번번이 퇴짜였다. 실의의 나날을 보내던 그는 부모에게 등 떠밀려 신부를 구하기 위해 베트남까지 왔다. 말이 통하지 않는 남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부부가 될 것이었지만, 미래에 대한 두려움만 가득했다.

2년 4개월이 지났다. 지난 2월 14일 충북 옥천군 청성면 삼남리 마을회관은 새로운 부녀회장의 탄생을 축하하는 웃음으로 환했다. 이 날의 주인공은 2003년 10월에 이곳으로 시집온 응우이엔 테이 럽 벗 비취. 한국 이름은 오진주. 어머니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국제결혼을 결심한 베트남 시골의 소녀 가장은 이제 한국 최초의 외국인 부녀회장이 됐다. 한국어도 꽤 유창하게 구사한다.

“진주가 온 뒤로 늙은이밖에 없던 마을에 생기가 돈다”고 삼남리의 박재수(66) 이장은 말했다. “어찌나 싹싹한지 마을 어른이 모두 ‘우리 며느리’라 부르며 아낍니다.” 영화배우 문근영이 ‘국민 여동생’이라면 오진주씨는 ‘삼남리의 국민 며느리’란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40여명의 주민이 사는 이 마을에 젊은 새댁이라곤 진주씨 한 명뿐이다. “농사일도 잘하고 한국음식도 잘 만들고, 마을 일에도 적극적이라 만장일치로 부녀회장을 뽑았다”고 박 이장은 말했다. 그녀의 시부모는 3년 전까지만 해도 동정을 받았지만 지금은 부러움의 대상이다. 자식들이 모두 도시로 떠나고 없는 이 마을에서 며느리가 차려주는 밥상을 받는 유일한 노부부이기 때문이다.

▲ "우리 부녀회장님, 너무 예뻐요" 마을회관에서 부녀회 회원들과 함께.
오진주씨는 김치와 된장찌개, 청국장을 직접 만들고, 명절에는 면민회관에서 배운 대로 차례상을 재현해 깜짝 놀라게 했다. 그녀의 수첩에는 음식의 재료와 제조법이 베트남어로 빽빽이 메모돼 있다. 농사일에는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했다. 고추를 따도 인삼을 심어도 한국의 토종 농사꾼보다 나았다. 대개 외국인 신부가 한국의 농촌 일에 적응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만 진주씨는 예외였다. “한국 농사가 베트남보다 편해요. 베트남은 일년 내내 농사 짓는데 한국은 봄·여름만 하잖아요.”

시아버지의 생일에는 풍선과 색종이로 장식을 만들고 서툰 글씨로 ‘아버지 생일 축하합니다’라고 써서 마을 전체를 감동시키기도 했다. 시부모도 며느리에게 선물을 했다. 작년 설에 남편과 함께 보름 동안의 친정나들이를 허락했고(베트남은 한국과 똑같이 음력 설을 쇤다) 사돈댁으로 1000만원을 부쳤다. 베트남 물가로는 1억5000만원쯤 되는 돈이다.

그러나 결혼생활이 처음부터 순탄치는 않았다. 결혼 초기엔 부부싸움이 잦았다. 어린 신부는 외로움과 우울증에 시달렸다. 또 바람둥이 아버지에 대한 반감 탓에 의부증(疑夫症)이 있었다. 남편이 친구의 아내나 심지어 형수와 얘기만 해도 잡아 끌거나 화를 냈다. 남편 김정기씨는 ‘우리 말을 모르니까 오해가 생긴다’고 생각했다. “집안에만 있어선 우리 말을 빨리 배울 수 없어”라며 신랑은 무릎 위에 신부를 앉힌 채 트랙터를 몰고 돌아다녔다. 청성면 새마을지도자협의회에도 아내를 대동하며 인사를 시켰다. 명랑하고 사교적인 진주씨는 금세 사람들과 친해졌고 말도 빠르게 늘었다. 그녀는 쾌활함을 되찾았다. “남편도 나 창피해하지 않고 나도 창피하지 않아요. 나이 많아도 나 사랑해주고 예뻐해 주면 돼요.” 신랑의 선배가 신부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비취가 한국에선 보석의 이름이니까, 진주가 어때?” “오! 진주! 좋군.” 그렇게 해서 진주가 이름이, 감탄사가 성이 되었다.

▲ 오진주, 김정기씨 부부.
부부는 둘 다 성격이 급해서 자주 토닥거린다고 하는데 냉전을 못 참는 쪽은 거의 진주씨다. “5분만 말 않고 있으면 쿡 찔러요. 오빠, 왜 말 안 해! 그럼 끝이죠.” 신랑이 음흉한 목소리로 “여보라고 불러야 한다”고 해도 “애기 낳으면 여보, 그 전엔 오빠”란다. 오진주씨 나름의 우리 호칭 해석이다. 부부는 아직 아이가 없다. “부모님은 재촉하지만 아내가 한국 생활에 적응할 때까지 임신을 미뤘어요. 이젠 더 미룰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김정기씨의 말이다.

올 봄은 오진주씨에게 특별하게 다가올 것 같다. 시어머니 전분혹(66)씨가 곳간 열쇠를 넘겨주기로 했다. 명실상부한 집안의 며느리로 경제권을 이양 받는 것이다. 그리고 3월이면 그토록 기다리던 주민등록증이 나온다. 이젠 대한민국 국민의 자격으로 베트남의 여동생들을 초청할 수 있다. 시아버지 김성환(68)씨는 “아들 없인 살아도 이제 며느리 없인 못 살겠다”고 말한다. “하는 짓마다 귀여워서 웃음꽃이 피고, 얘 오고 나선 골 낼 일이 없어요. 하루는 부침개에 빨간 고추, 파란 고추로 수를 놓고 있기에 들여다보니 희망, 행복, 그런 글자를 만들고 있더군요. 정말 엉뚱하지 않습니까?”

희망과 행복. 오진주씨는 베트남에서도 그 글자들을 자주 썼을까. 행복은 그녀가 한국에 와서 받은 선물이 아니라, 가족에 대한 헌신의 길을 선택한 한 소녀가 남루한 한국의 농민 가족에게 가져온 선물일 것이다.

옥천= 허만갑 주간조선 기자 mghuh@chosun.com
입력 : 2006.02.26 11:37 1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