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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Opinion)

''시스템운영의 鬼才'' 박정희식 일하기

by mo516 2006. 2. 4.

'시스템운영의 鬼才' 박정희식 일하기
朴正熙 대통령이 사업을 추진할 때는 4단계를 밟았다. ①원리의 도출 ②원칙의 수립 ③시행계획 작성 ④집행 단계이다.
趙甲濟
吳源哲(전 대통령 경제제2수석비서관. 중화학기획단장)


브리핑이 成敗 결정

朴正熙 대통령이 사업을 추진할 때는 정해진 단계가 있다. ①원리의 도출 ②원칙의 수립 ③시행계획 작성 ④집행 단계이다.
朴正熙 대통령 때는 「브리핑 행정시대」 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그 중요성이 컸다. 브리핑 제도를 이해 못하고는, 朴대통령 시대의 행정을 이해할 수가 없다. 브리핑을 할 때는 그 목적과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내용이 있게 마련인데, 이것이 브리핑의 골자를 이룬다.

○ 「출발점」부터 「결론」까지 모두 포함되어야 하는데, 그 줄거리는 一路 매진하는 식으로 나가야지, 흔들려서는 안 된다.
○ 구분을 해 주어야 이해하기 쉽다. 구분에는 큰 구분과 작은 구분이 있다. 그리고 메시지 전달을 돕기 위해 도표를 많이 사용한다.
○ 브리핑 설명은 순식간에 납득이 가능하도록 간단명료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이해하기 쉬운 말을 써야 하고, 거부감이나 혼선이 생겨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난해한 이론은 금물이다.
○ 강조해야 할 사항은, 되풀이 설명한다. 되풀이 설명하면 여러 사람이 머리에 남게 된다. 학술논문 발표와는 다르다는 뜻이기도 하다.
○ 결론은 명확해야 한다. 이론 정연하고 실시 가능한 방안이 나와야 한다. 그래야만 청취자 전부가 동감을 하게 되고, 대통령은 결단을 내릴 수 있다.

① 원리(原理)의 도출

원리라는 것은 발견되는 것이지 생각해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국민의 민생고 해결과 경제자립」은 우리나라 1960년대 초기의 「경제개발 원리」였다. 朴대통령은 이 원리를 달성하기 위해, 「경제개발 5개년계획」 이라는 정책을 수립해서 추진했으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그래서 「수출제일주의 정책」으로 전환을 했다.
수출을 하다 보니 「수출이야말로 국가 기본전략」 이라는 점을 발견하게 된 朴대통령은, 「수출제일주의」를 우리나라의 국시(國是) 즉, 「경제발전 원리」로 승격시켰다. 「국민생활향상」 「고용증대」 「수출제일주의」 「공업입국」 「전산업의 수출화」 「국민의 과학화」 「남북한 경쟁에서의 승리」 「고도산업국가 건설과 선진국 진입」 등이 「경제원리」에 속하는 사항이다. 국가원수인 朴대통령이 직접 담당해야 할 과제인데, 청와대 비서진이 보좌하게 된다. 朴대통령은 임기 18년 동안, 도출된 원리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그래서 국민도 믿고 따라간 것이다. 원리가 통하는 시대였다는 뜻이다.
원리(原理)나 국시(國是)라는 것은 잘못 사용하다 보면, 정치 구호화(口號化)되기 쉽다. 어떤 정치가가 「우리나라가 잘 살기 위해서는 수출을 해야 한다」고 떠들어 보았자, 이것은 정치구호의 역할밖에 못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피하려면 비전 형태로 제시해야 하는데, 비전이 좋으냐, 나쁘냐에 따라 성패가 좌우된다. 그래서 비전을 효과적으로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국가원수의 중요한 책임사항이 되는 것이다. 朴대통령은 수치화(數値化)하는 방식을 썼다. 수치로 표시하면, 국민들은 알아듣기 쉽다. 목표가 달성되었을 때의 수준을, 현재와 비교할 수 있고, 진행 과정도 수량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朴대통령은 「수출 제1주의시대(1964~1970년)」에는 10억 달러의 수출목표를 제시하면서, 연간 40%의 수출증가율을 요구했다. 이 목표가 달성되면 보리밥을 먹을지언정 국민의 생활고(生活苦)는 해결된다고 했다. 경제자립의 기초가 마련된다고 했다. 「全산업의 수출화시대(1973~1980)」에는 100억 달러의 수출목표와, 년간 40%의 수출증가율을 지시했다. 이 목표달성으로 국민 1인당 GNP는 1,000달러가 돼서 국민의 의식주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고, 우리나라는 중화학공업국가가 된다고 했다. 북한과의 경제전에서는 완승(完勝)한다고 했다.
그리고는 「하면 된다. 우리도 할 수 있다」며 정부를 독려하고, 국민을 격려했다. 이것이 朴대통령의 국가경제건설 전략이었다. 그 결과 연간수출증가율은 1964~1970에는 41.9%, 1971~1979에는 39.8%를 달성했다. 16년간 평균 40%의 성장이라면, 기적과도 같은 성과이다. 朴대통령의 성품 즉, 신념, 집념 그리고 고집을 잘 나타내는 결과이다. 수출이 증대하다 보니, 그 효과는 全산업에 파급되고 고용도 급격히 늘어났다. 국민의 생계도 좋아졌다. 우리나라의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또한 정신면에서는 「하면 된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용기와 자신을 심어주기 위한, 산 교육장 역할도 했는데, 이 정신은 지금까지도 살아 남아서, 한국인의 정신적 지주(支柱)가 되고 있다.

② 다음 단계는 원칙의 작성이다.

행정면에서는 정책수립단계라고 할 수 있다. 각 담당부처에서 작성되는데 국가원수인 朴대통령의 재가를 얻어야 확정된다. 이때, ‘브리핑’하는 방식이 활용됐다.
이 자리에는 국무총리 이하 각부장관, 관계기관장 등이 배석하는데, ‘브리핑’은 해당과제에 대해서, 가장 지식이 많은 공무원이 담당한다. 보통은 국장급이 했지만, 과장급도 국가大事에 대해 정책을 수립해서, 대통령 이하 정부 최고 간부 앞에서 설명하고, 질문에 대해서 답변한다는 뜻이다. 실무에 밝은 朴正熙 대통령은 브리핑을 받는 자리에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질 때가 있는데, 이때 장차관이 답변을 못하는 경우가 나오기 때문에 생겨난 제도이다. 국장이든 과장이든 간에, 내용을 가장 잘 아는 실무공무원 즉, 테크노크라트가 우대받던 시대였던 것이다.
두 부처에 관계되는 사항에 대해, 두 부처간에 의견이 다를 때에는, 같은 장소에서 두 부처가 제각기 브리핑을 할 때도 있다. 이렇게 되면 브리핑을 담당하는 두 부처의 공무원간에, 격론이 벌어질 때가 있는데, 朴대통령은 모든 의견을 다 듣고 최종결단을 내렸다. 이럴 때는 어느 쪽도 불평할 수가 없었다. 양 부처 장관은 사전에 합의를 끌어내지 못한 책임이 있어, 대통령에게 송구하기 때문이다.
장관이 최종결정을 못한 채 브리핑할 때가 있다. 즉 결론에서 A안과 B안을 내놓고, 서로간의 장단점만 설명할 때이다. 이럴 때 朴대통령은 「장관! 당신은 A안을 택하겠다는 것이요, B안을 택하겠다는 것이요」 하고 호통을 친다. 장관은 책임행정을 하라는 뜻이다. 각 해당부처에서 작성하는 경제개발 계획은, 장관 이하 全공무원이 머리를 맞대고 합심해서 수립하는 것이지, 대통령의 눈치나 보고 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질책이기도 하다.
각 부처에서 정책을 수립하고, 대통령 재가를 받기 위해 브리핑할 때에는, 마지막 페이지에 꼭 건의사항이 나온다. 보통은 「자금요구」 사항이 된다.
요약 정리하면, 정책사업은 ① 각 부처의 국장이나 과장급에서 성안을 하고 ② 장관의 결재를 얻은 후 ③ 관계장관이 배석한 자리에서 대통령에게 브리핑하게 된다. ④ 이 회의에서 검토를 거친 후 사업이 확정되는데 ⑤ 소요예산도 이때 확보된다. 이런 절차에 따라 결정된 사업을 「대통령 관심사업」 이라 칭했다.

③ 세부계획 작성에 들어가는 단계이다

세부 계획은 각 부처에서 수립하는데, 중요한 안건은 서류로 작성해서 대통령의 결재를 받기도 하지만, 장관 책임하에 확정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결정된 계획은 장관 책임하에 집행하게 되는데, 성공하면 그 부처의 공이 되고, 실패하면 책임을 지게 된다. 전적으로 각 부처의 책임행정사항에 속한다.
원리와 원칙이 제대로 확정되었다면, 세부계획 단계에서의 작업은 수월해진다. 또한 자유재량의 폭이 적어져서, 非理의 발생 소지가 줄어든다. 세부계획 작성 단계에서는 공장 설립과 관계가 많다.
세부계획 작성 단계에서의 한 특별한 예를 든다. 국군 현대화 사업(율곡사업)의 사업추진 과정이다. 朴대통령은 이 사업의 추진과정에서, 무기의 선정은 무관(武官)에게 담당시키되, 이에 대한 검토는 문관(文官)에게 맡겼다. 미국의 군사원조가 무상원조(MAP)에서 유상원조(FMS)로 바뀌어지자 朴대통령은 외무부 직원 崔洸洙 국장(후에 청와대 수석 비서관, 외무부 장관 역임)을 국방부 군수차관보로 임명했다. 현역군인이 아닌 문관(文官)출신으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朴대통령의 의도는 명확했다. 율곡사업과 같은 국가 기밀사업일지라도, 일반예산과 똑같이 ① 경제기획원의 예산당국에서 검토를 해야 하고 ② 국회의 심의과정 같은 절차를 받아야 하고 ③ 청와대 비서실에서 검토 후 대통령 재가를 받아서 집행해야 하고 ④ 감사원과 같은 기구에서 감사를 받아야 한다는 기본원칙을 고수하겠다는 朴대통령의 강한 의지의 표출이었다.

④ 사업추진 과정이다.

朴대통령은 큰 사업에 착수 할 때에는, 꼭 기공식에 참석해서 축사를 통해 격려를 했다. 공사 중에도 현지 방문을 자주 함으로써 작업진도를 확인했는데, 주로 공장장이나 현장책임자로부터 기술적인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준공식에도 꼭 참석해서 노고를 치하하고 훈장을 수여했는데, 주로 기술자의 몫이었다.
朴대통령은 행사를 끝내고 서울로 돌아갈 때에는 차량을 이용할 때가 많았다. 지방에 산재해 있는 수출품 제조 공장이나, 새마을 농촌 등 관심사업 몇 군데를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때로는 통고 없이 갈 때도 있으니, 아무런 사전준비도 못한 상황이 되거나, 사장이 부재중일 때도 있었다. 당시에는 어떤 작은 공장이나, 시골의 새마을 농촌에서도, 브리핑 차트는 준비되어 있었고, 웬만한 간부는 브리핑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이 당시의 유행이었다.
朴대통령은 현장을 둘러보면서, 현장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설명을 듣는다. 그리고 떠나기에 앞서 “애로사항은 없느냐”고 물어본다. 새마을 농촌에서는 “숙원사업은 없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이러한 ‘애로사항’이나 ‘숙원사업’에 대해서는 그 자리에서 비서실장에게 지시해서 문제를 해결토록 했다. 이런 일들은 큰 뉴스거리가 되기 때문에 「일하는 대통령」의 이미지를 국민에게 심어주게 된다.
한반도의 남단 여천에는 중화학공업건설(6개업종)의 하나인 화학공업 콤플렉스가 위치해 있다. 朴대통령은 이 공업지구를 건설함으로써, 북한의 공업을 완전히 압도하려고 했다.
朴대통령은 여천을 수 차례 방문했다. 부두가 완성되자, 朴대통령은 이곳을 시찰했다. 그리고는 항만 관리소를 찾아가서, “여기는 외국선박이 자주 드나드니, 외국선원들도 많이 찾아올 것이다. 부두가 더러우면 한국에 대해 나쁜 인상을 주게 될 것이다. 미화(美化)작업도 하고, 늘 깨끗이 하시오.”라고 했다. 그 후 朴대통령은 또 한번 찾아갔다. 아마도 미화작업 확인차 들렀을 것이다. 부두는 깨끗하게 잘 정돈되어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전국의 각 공단에서는, 미화작업에 힘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화작업 우수업체 콘테스트」를 열고 표창도 했다.
필자는 대통령 서거 후 10여 년 만에, 여천에 갈 기회가 있었다. 이때 옛날 생각이 나서 부둣가를 거닐었는데, 거기에는 온갖 쓰레기가 산더미 같았다. 경비원이 있기에 연유를 물어보았다. 그는“높은 사람이라곤 10여년간 한 사람도 찾아온 적이 없어요. 그러니 누가 관심이나 갖겠소.”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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