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일고 합격통지 받던 날 돌아가신 아버지 >21살부터 주식투자, 26세 때 사설 투자자문사 설립 >‘당대의 큰손’ 백할머니와의 만남 >2~3년 전부터 공무원들에 “벤처 투자 말라” 조언
>“게이트는 금감원·검찰 조사 받은 기업에서 터진다” >“현상 너머 본질을 보라, 책 속에 답이 있다” >미국 체류 진짜 목적은 투자 자문 해외 네트워크 구축 >올해 중 해외 펀드 출범…강력한 투자은행 설립이 목표
>“정치권과 멀다고 불이익 받으면 한국은 희망 없는 나라” >“중국 활황 이면을 봐야, 고성장 유지 못하면 위험” >“복지재단에 75억원 기증 후 이틀 잠 못 자”
------------------------------------------------------ IMF 구제금융 사태라는 초유의 국가위기 상황은 역설적으로 수많은 ‘스타’를 배출했다. 주식시장을 포함한 금융계 인사들도 적지 않았다. 그 중 각종 ‘게이트’나 주가조작 시비에 휘말리지 않고 이전의 명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이는 김정태 국민은행장과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44) 정도일 것이다.
김행장이 현재 한국 금융계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영인이라면, 박회장은 미래 자본시장에 어떤 식으로든 큰 변화를 몰고 올 인물로 주목받고 있다. 1997년, 11년간의 증권사 샐러리맨 생활을 청산하고 경영자의 길로 들어선 박회장은 5년 남짓한 기간 동안 두세 걸음 앞선 미래 분석과 과감한 추진력으로 놀라운 성공신화를 창조했다. 코스닥 열풍이 몰아치기 2년여 전, 일찌감치 벤처기업에 눈을 돌려 막대한 수익을 올렸고, 1998년 12월에는 국내 최초로 뮤추얼펀드를 도입해 주식시장에 간접투자 돌풍을 일으켰다. 1999년 12월 미래에셋증권을 설립하면서는 업계의 비난과 우려를 뚫고 파격적인 위탁수수료 인하를 단행, 단숨에 약정 순위 6~7위 증권사로 도약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2000년 3월, 박회장은 또 한번의 ‘파격’을 시도한다. 개인 성과급 75억원을 쾌척, ‘박현주재단’을 설립한 것이다. 박회장은 재단이사장은 물론 이사진에도 이름을 올리지 않음으로써 재계 안팎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박현주가 떴다” 그런 박회장이 2001년 2월 돌연 미국 유학길에 오르자 증권업계는 또 한번 술렁거렸다. 같은 해 11월, 본업에 복귀하면서는 “박현주가 떴으니 증시도 뜰 것”이라는 소문이 시장을 휩쓸었다. 이제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업계를 넘어 대중적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박회장에 대한 업계의 평가는 유보적이다. ‘자본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꾼 개척자’라는 점에는 대체로 동의하나, 지나치게 빠르게 성장해온 까닭에 그 미래상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하는 분위기다. “너무 앞서간다”거나 “돈만 아는 투기꾼”이라는 비난도 있다. “뒤에 뭔가 있는 것 아니냐”는 악의적인 추측도 없지 않다.
분명한 것은, 그가 1970년대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이 그랬듯 2000년대 샐러리맨의 우상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그 노하우를 배우고 조언을 듣고 싶어하는 최고의 투자전문가라는 사실이다.
지난해부터 박회장은 언론과의 인터뷰를 극도로 자제해 왔다. 많은 기자들이 취재를 시도했지만 쉬 성사되지 않았다. 박회장 측은 그 이유로 “미래에셋은 아직 갈 길이 먼 회사다. 순이익이 1000억원을 넘어서고 해외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한 다음 제대로 하고 싶다. 신생사인 미래에셋에 대한 업계 일각의 불편한 시각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들었다. 또한 “미래에셋은 수많은 직원들의 노력으로 발전해 온 회사다. 창업자만 부각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뜻도 밝혔다.
정치권과 관련한 몇몇 악성 루머 때문에 예민해진 측면도 없지 않았다. 미래에셋의 한 임원은 “누군가에게 당신 도둑질 한 것 아니냐고 묻는 것 자체가 인격 모독 아닌가. 우리는 그런 모욕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인터뷰 성사가 불투명한 까닭에 먼저 증권업계와 박회장 주변 사람들을 대상으로 간접 취재에 들어갔다. 그 중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박회장과 불편한 관계에 있는 이들도 있었다. 특이한 것은 친소(親疎) 관계를 떠나 박회장을 잘 아는 사람일수록, 그가 시장경제 원칙에 반하는 일을 할 인물이 아니라는 강한 확신을 갖고 있다는 점이었다. 또한 이런저런 소문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이들조차 “당신에게 여유 자금이 있다면 박현주에게 맡기겠느냐”는 질문에는 대체로 “그렇다”고 답했다.
오랜 줄다리기 끝에 지난 2월10일, 마침내 인터뷰가 성사됐다. 박회장이 미국출장 중이었던 까닭에 국제전화를 이용했다. 완강한 태도로 인터뷰를 고사해온 박회장이었지만 일단 결정을 내린 후에는 적극적인 자세로 임했다. 인터뷰는 미국 현지시간으로 새벽 1시부터 5시까지 장장 4시간에 걸쳐 이루어졌고 3일 후 같은 시각, 다시 1시간 동안 계속됐다.
박회장은 오랜 통화에서 개인사는 물론 기업관, 정치관, 증시전망, 한국 자본시장의 미래 등에 대해 거침없는 답변을 토해냈다. 미래에셋의 비전도 제시했는데, 올해 안에 해외 펀드를 출범시킬 예정이며 투자은행 설립을 계획중인 점, 해외 투자자문 네트워크 결성, 지분의 30% 한도 내에서 해외 투자를 받기 위해 협상 중이라는 소식 등은 금융계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킬 만한 것들이었다. 박회장은 “나에게는 꿈이 있다. 우리 자본시장의 큰 흐름에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만약 내가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이유로 회사에 문제가 생긴다면 한국 사회에는 희망이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아버지 잃고 방황했던 사춘기 박회장의 고향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평동이다. 1988년 광주시에 편입되기 전까지만 해도 평동은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었다. 아버지는 자수성가한 농사꾼이었다. 혼례식 날, 이웃사람의 양복과 구두를 빌려야 했을 만큼 가난했던 아버지는 박회장이 태어날 즈음에는 제법 큰 농사를 짓는 중농이 되어 있었다.
-고향이 평동이군요. 그런데 왜 주변사람들은 송정리(현 광주시 광산구 송정동)로 알고 있을까요.
“학교를 거기서 다녔기 때문일 겁니다. 부모님은 저를 평동국민학교가 아닌 송정리 학교로 보내셨어요. 조금이나마 규모가 큰 학교에 보내고 싶으셨던 거죠. 송정리에는 광주공항이 있어 같은 시골이라도 좀 더 개화된 분위기였습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10리 길이었는데 늘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녔어요. 눈 쌓인 겨울엔 고역이었죠. 그 때 집안 형편이 운동화 한 켤레 못 사 줄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동네 다른 아이들 못 신는 걸 내 아들만 신게 할 순 없다 해서 안 사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송정리 중학교에 진학했다 광주로 전학을 갔습니다. (부모님께서는) 공부하라는 말씀은 안 하셨지만 늘 책읽기를 권하셨지요. 덕분에 독서 습관이 생겼고 글짓기에도 취미를 붙였습니다.”
박회장의 학창시절을 아는 고향 친구들은 그를 ‘수재’로 기억하고 있었다. 중학교를 수석 졸업했음은 물론 작문 실력이 뛰어나 큰상도 여러 차례 받았다. 박회장 형제들은 대체로 학업성적이 우수했다. 박회장보다 12년 연상인 맏형 태성 씨는 저명한 신경외과 전문의다. 전문의 시험에 수석 합격한 후 미국으로 유학 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워싱턴대 의대 신경외과 종신교수다. 여동생 정선 씨는 이화여대를 거쳐 미국 로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명지전문대 유아교육과 교수다. 남편은 오규택 중앙대 경영학과 교수. 오교수는 박회장의 광주제일고(이하 광주일고) 동기동창이기도 하다.
여러 형제 중에서도 가장 큰 기대를 모았던 박회장은, 그러나 광주일고 진학과 더불어 공부와 담을 쌓고 만다. 호남 인재의 집결지라는 광주일고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지만 예기치 못한 불행과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부친이 일찍 돌아가셨다고요.
“그렇습니다. 광주일고 합격 통지서를 받던 날이었어요. 건강한 분이셨는데 갑작스레 돌아가셨지요. 굉장히 놀랐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아버님은 정직하고 성실한 분이셨어요. 그런데 그리 허망하게 가시다니요. 사실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고 삶의 근본은 무엇인지, 선악은 무엇이며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회의하게 됐습니다. 자연히 공부는 뒷전이었죠. 삶 자체가 의심스러운데 공부 열심히 해 좋은 대학 들어간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한마디로 아주 ‘진한’ 사춘기를 보냈습니다. 지금도 제 뇌리에는 고등학교 시절이 깊이 각인돼 있어요.”
-성적은 어땠습니까.
“그 때 우리 학년 학생 수가 760명 정도였습니다. 그 중 60명은 운동선수였으니 입시 준비생은 700명쯤이었다고 봐야겠지요. 그 중 698등으로 졸업했습니다. 거의 꼴등이었죠.
고 3 끝 무렵이 돼서야 공부 안한 것을 후회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절 불러 놓고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공부 안 해도 좋다, 바르게만 살아라, 대학 가기 힘들면 고향에서 농사짓자.” 그런데 그 말씀을 하시면서 우시는 겁니다. 어머니는 고등학교 3년 내내 제가 딴 생각에 빠져 사는 걸 알면서도 끝내 공부하란 말씀 한번 안 하셨던 분입니다. 그렇게 강인하고 말을 아끼시는 분이 자식 앞에서 눈물을 보이다니, 그만 가슴이 무너졌지요.”
26세 때 사설 투자자문사 설립 -고교 동창들은 박회장이 괴짜였다고 하더군요. 학교 생활은 어땠습니까.
“책을 좀 읽었지요.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봤는데, 읽다 보니 제가 전략을 다룬 책에 유난히 끌린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나 케네디 자서전, 키신저 자서전 같은 것들은 대여섯 번씩 거푸 읽었습니다. 꼭 서울대에 가야겠다는 생각도 없었어요. 1학년 때 학교에서 희망대학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서울대가 아닌 다른 학교를 적어 낸 사람은 세 명뿐이었습니다. 저도 그 중 한 명이었죠. ‘왜 서울대만 가야 하나’ 하고 생각했어요. 좀 조숙했다고 할까요. 예비고사도 안 봤습니다. 광주일고 학생은 전원 합격하던 시절이었지만 전 ‘대학 갈 생각도 없으면서 그걸 왜 보나’ 싶어 아예 응시하지 않았습니다.
아버님의 죽음은 제 가치관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요즘도 제가 가끔 “부질없는 일이다…” 하고 혼잣말을 할 때가 있어요. 과한 욕심이 생기거나 우쭐해지려 할 때지요. 그러고 보면 세상에 100% 나쁜 일은 드물어요. 저만 해도 힘들었던 사춘기 덕분에 정신적으로 많이 성숙해졌고 모자간의 사랑도 깊어졌으니까요.
어머니는 부모로서 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가장 존경하는 분입니다. 부지런하고 인정 많고 아주 정확하시죠. 우리 집 기상시간은 오전 5시였어요. 그때 일어나 찬물로 목욕부터 하고 하루를 시작하는 겁니다. 또 예를 들어 내일 누구한테 빌려준 돈 받을 일이 있다, 그러면 실제로 그 돈이 손에 들어올 때까지는 절대 말씀을 안 하세요. 미리 들뜨는 일도, 기대를 내비치는 일도 없으시죠.”
부친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의사가 되겠다며 이과를 지망했던 박회장은 재수 중 문과로 방향을 바꾼다. 고교 시절 독서의 결과로 ‘조직을 만드는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갖게 된 때문이었다.
(주)인슈코리아 김재영 사장은 박회장과 고교 동기로 서울 종로학원에서 재수 생활을 함께 했다. 그는 재수 시절의 박회장에 대해 “행동이 거침없고 집중력이 뛰어났다. 시골 출신답지 않게 여학생들에게도 말을 잘 붙여 부러워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1978년 박회장은 고려대에 입학했다. 김사장 또한 고려대에 진학해 두 사람은 4학년때부터 3년 남짓 함께 자취생활을 했다. 경영학을 전공한 박회장은 대학원 진학과 더불어 공인회계사 자격 시험을 준비했다. 박회장은 “회계사가 목적이 아니라 회계사무소(그러니까 조직)를 차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현주는 상당한 독서가였어요. 공부도 열심히 했고요. 1980년 ‘서울의 봄’ 때 고교 선배가 총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했습니다. 현주가 찬조연설을 했는데 그게 상당히 화제가 됐어요. 후보연설보다 훌륭했거든요. 또 어쩌다 포커 같은 걸 치면 승률이 굉장히 높아요. 두뇌 게임이나 심리 게임에 능하달까요.” 김재영 사장의 증언이다.
다시 박회장의 얘기를 들어보자. -대학 생활은 어땠습니까. “그때부터 경영자가 돼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리더십에 관심이 많았지요. 경영·경제학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못한 걸 그때 다 한 셈이예요. 책도 좀 읽었는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제3의 물결’이었습니다. 19번을 읽었어요.”
-총학생회장 선거 찬조연설을 했다고요. “아, 그거요. 학교 선배가 출마한다기에…. 사실은 저도 그런 일을 한번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따져보니 전 ‘그릇이 작아’ 안되겠더라고요. 학생운동을 열심히 한 편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전 정치를 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대학 갈 때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있어요. 절대 정치는 하지 말라는 거였습니다.”
-총학생회장 출마자는 언젠가 정치를 할 사람이라고 판단한 겁니까. “그렇습니다. 정치적 욕구가 없다면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죠. 다른 학생들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몰라도, 전 정확하게 그리 되리라 예상했습니다. 지금 보십시오. 성공했느냐 못했느냐, 그런 차이는 있겠지만 정치 쪽에 몸담고 있는 분들이 상당수 아닙니까.”
-대학 때부터 주식 투자를 시작했지요. “대학교 2학년 때부터였습니다. 강의를 듣는데 주식 얘기가 자꾸 나와요. 현실 경제에서 주식이라는 게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고 싶었죠. 그때부터 명동 증권가를 기웃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1년 학비·생활비를 한 몫에 부쳐주셨어요. 돈 관리하는 법을 배우라는 뜻이었죠. 그걸 가지고 직접 투자에 나섰어요. 몇 년 관심을 갖다 보니 전체 그림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당대의 큰손’ 백할머니와의 만남 이후 박회장의 개인사는 우리 증권업계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박회장 자신이 그 주인공이거나 변화의 주역이었던 경우도 적지 않았다.
박회장은 대학원생이던 1984년, 사설 투자자문사인 내외증권연구소를 설립했다. 그 동안 증권 투자를 통해 번 돈으로 서울 회현동 코리아헤럴드 빌딩 18층에 20평 남짓한 사무실을 얻었다. 여직원도 한 명 두었다. 26세 때의 일이다.
-그 때 투자자문회사 설립이 가능했습니까. “당시는 관련법조차 없던 때였습니다. 확실치는 않지만, 제가 차린 회사가 국내 최초의 투자자문사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제 생각은 단순하지만 확고했습니다. 1985~1986년이 되면 한국 주식시장이 기지개를 켤 것이다, 그런데 지금 증권사들은 문제가 많다, 내가 하면 정말 잘 할 수 있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이미 제 머리 속에는 뮤추얼 펀드를 운영해보고 싶다는 구체적인 목표가 들어 있었습니다.
주식거래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명동 일대 증권사들을 수시로 훑고 다녔습니다. 직원들끼리 화투 치는 모습을 종종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엉성했어요. 거래도 과학적 분석보다는 소문에 의존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시장을 움직이는 건 주가조작이라는 말이 돌만큼 분위기도 혼탁했죠.
저는 시장분석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1984년 무렵 이른바 ‘3저’ 기조가 포착되기 시작했고, 자본자유화가 코앞에 닥친 데다, 삼성전자가 CB를 발행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증시 활황이 시작되리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당시 국내 경제상황은 폭발적 주가 상승이 있었던 1960년대 일본과 매우 흡사했어요. 그런 근거들을 가지고 ‘한국 증권시장에 대한 전망’이라는 보고서 하나를 작성했는데 그게 돌고 돌아 어느 날 다시 제 손에 들어온 겁니다. 근데 보고서 작성 주체가 내외증권연구소가 아닌 일본 노무라증권으로 돼 있어요. 허탈해서 웃어버렸죠.”
김재영 사장은 증권연구소 시절의 박회장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연구소를 차릴 무렵 현주는 이미 증권가에서 제법 유명세를 얻고 있었어요. 젊디 젊은 청년이 놀라운 수익을 올리는 데다 시장 예측도 잘 맞아 떨어졌으니까요. 전광판이 온통 파란색(폭락장세)인 날이 있었는데 현주는 있는 돈을 다 끌어 모아 ‘사자’ 주문을 냈고, 결국 며칠 사이에 큰 이문을 남겼습니다. 평소 현주가 자주 하는 말이 ‘돈을 벌려면 소수 편에 서라’는 것인데 20대 중반에 이미 그 원리를 체득한 거죠.”
대학원생 시절 박회장은 명동 사채 시장의 대모 ‘백할머니(본명 백희엽, 1995년 5월 사망)’를 찾아갔다. 1960년대 말부터 주식 투자를 시작한 백할머니는 주가 조작이 만연한 당시에도 우량주 중심의 장기 투자로 큰 수익을 올려 ‘투자 철학을 지닌 큰 손’이라는 평판을 듣고 있었다.
“불쑥 찾아가 ‘좀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어찌어찌해서 뒤를 따라다니게 됐죠. 할머니 사무실로 출근하고 증권사나 기업체 방문 때 동행하기도 했습니다. 가만 보니 이 양반이 정석 투자만 하는 거예요. 답답할 정도로 원칙을 고수하더군요. 사회적 기여도가 높은 기업, 내용이 좋은 기업 주식만 사 2년이고 3년이고 기다렸다 시장이 흥분하면 비로소 팔았습니다. 그걸 보면서 우량주는 반드시 제 몫을 한다는 사실을 배웠어요.”
45일만의 대리 승진 1986년, 박회장은 내외증권연구소의 문을 닫았다. 투자자문사 설립에 법적 근거가 없는 점과 아직 개인사업자가 독자적 브랜드로 자본 시장에 뛰어들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리고 증권사 입사를 결심한다.
“명동에서 이름이 좀 났던지 대리나 과장으로 특채하겠다는 증권사가 몇 개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 가고 싶은 데가 따로 있었어요. 무엇보다 좋은 상사 밑에서 일하고 싶었죠. 그래서 점찍은 이가 동양증권 이승배 영업상무(현 한셋투자자문 사장)였습니다. 당시 이상무는 증권업계 최고 스타였어요. 32세에 수습사원으로 입사, 8년만에 이사가 된 입지전적 인물이었죠. 또 ‘이승배 사단’을 거느리고 있을 만큼 조직 관리 능력이 탁월했습니다. 어린 제게는 태산처럼 큰 존재로 보였죠.
동양증권 입사를 결심하고 무조건 이상무 사무실로 찾아갔습니다. 양복도 아니고 면바지에 셔츠 하나 걸치고 갔더니 비서가 상대도 해주지 않더군요. 첫날은 얼굴도 보지 못했고 둘째날에야 겨우 이상무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후의 얘기는 이승배 사장에게 직접 들어보자. “어느날 아침 출근했는데 누가 날 찾아왔다고 해요. 보니 웬 쬐끄만 녀석이 들어와 대뜸 ‘날 써라’ 그러는 거예요. 무슨 소리냐고 했더니, 다른 증권사에서 과장 준다 대리 준다 하는데 이승배 밑에서 배우고 싶어 찾아왔다는 겁니다. 관심 없으니 가라고 그냥 내쫓아 버렸지요. 그랬더니 다음날 똑같은 시간에 다시 찾아왔어요. 이번에도 그냥 돌려보냈습니다. 근데 셋째날 또 와요. 역시 쫓아냈더니 다음날 또 왔더군요.
그 때는 앞에 앉혀 놓고 얘기를 좀 했습니다. ‘왜 꼭 나냐’ 그랬더니, 자기가 좀 알아봤는데 제 영업스타일이나 브로커로서의 자세가 마음에 든다나요. 그래서 제가 나무랐어요. ‘자네가 알긴 뭘 아나. 나는 특채 제안 다 물리치고 수습부터 시작한 사람이야. 대리나 과장 욕심을 내다니 증권맨으로서 기본이 안돼 있구먼.’ 그러고 내보내면서 이젠 끝이거니 했어요. 그런데, 아, 다음날 또 찾아온 겁니다.
‘좋습니다. 사원으로 뽑아주십시오. 대신 상무님 정면에 자리를 만들어 주십시오.’ 그 땐 저도 두 손 들고 말았습니다. 한편으로는 프로 자질이 있어 보여 욕심이 나기도 했죠. 당시만 해도 증권사 영업직은 관리직이나 다를 바 없었어요. 그런데 제가 영업 상무 일을 해 보니 영업직에는 프로가 꼭 필요하겠더라고요.”
1986년, 박회장은 동양증권 영업부 신입사원이 된다. 이사장은 약속대로 자신의 자리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맞은편 벽 앞에 박회장의 책상을 놓아주었다. 그로부터 45일 후, 박회장은 대리가 됐다. 이사장은 초고속 승진을 시킨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3개월 딱 시켜보니 다르더군요. 그 때는 감이나 루머에 따라 매매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그는 분석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어요. 이 아이는 분명 스타가 될 거다, 확신이 왔습니다. 저런 친구는 빨리빨리 업계 리더로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발령을 냈죠.”
1988년, 이사장이 창업을 위해 동양증권을 그만두자 ‘사수’를 잃은 박회장은 동원증권(구 한신증권) 김정태 인사담당 전무(현 국민은행장)를 찾아갔다. 김전무는 박회장의 형 태성 씨의 광주일고 동기동창이기도 하다.
동원증권의 ‘광주일고 3인방’ -역시 불쑥 찾아간 겁니까. 형과의 인연을 내세웠나요. “아니죠. 제가 먼저 찾아간 건 맞습니다만 철저히 제 브랜드로 밀고 나갔습니다. 제가 몸담고 있던 시절 동양증권 영업부가 최초로 전국 약정 1위를 차지했는데 그 중 4분의 1을 제가 했어요. 그 때 영업부 직원 수가 70명이었습니다. 자연히 유명세를 타게 됐죠.”
박회장은 김전무와의 면담에서 당당히 과장 자리를 요구했다. 증권사의 보수적 분위기를 우려한 김전무는 박회장을 동원투신(구 한신투자자문) 창립 멤버로 발령 냈다. 투자자문업은 박회장도 관심이 많은 분야였다. 그러나 아직 시장이 무르익지 않아 자문 의뢰가 거의 없었고 조직도 유연하지 못했다. 마침 박회장의 실력을 높이 산 동원증권의 한 임원이 그를 증권사로 불러들였다. 박회장은 동원증권의 자산을 관리하는 주식운용 과장이 됐다.
당시 동원에는 ‘광주일고 3인방’으로 불리는 이들이 있었다. 동기동창인 세 사람은 박현주, 장인환(현 KTB자산운용 사장), 송상종(현 피데스투자자문 사장)이었다. 이들 셋은 차례로 주식운용 과장 자리를 거치며 젊은 나이에 높은 투자 수익과 약정고를 기록해 화제를 모았다.
10여년 전만 해도 증권업계에는 유난히 호남 출신이 많았다. 박회장은 사석에서 “처음 증권사 들어가니 표준어가 호남말이더라”고 한 적이 있다. 당시 증권사 신입사원의 월급은 12만원 선. 단자회사나 종금사가 85만원 정도였던 데 비하면 턱없이 낮은 액수였다. 자연히 지역 차별로 인해 대기업 입사가 쉽지 않았던 인재들이 증권사로 몰렸다. 특히 동원증권은 금융권에서도 대표적인 호남 기업이라 한때는 남도 사투리를 쓰는 직원이 전체의 50% 이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광주일고 3인방’의 동원 입성도 이와 무관치 않았다.
1991년, 박회장은 33세의 나이에 동원증권 중앙지점장이 됐다. 국내 증권사 최연소 지점장의 탄생이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지점장이 돼 부담이 컸겠습니다. “당시는 지점장 되기를 기피하던 때였어요. 증시가 폭락세로 돌아서 전 재산을 잃은 투자자가 속출하던 시기였죠. 지점에 가 보니 실적 뛰어난 임원 한 분이 건강 문제로 회사를 그만두면서 약정고가 뚝 떨어져 있었어요. 전국 증권사 지점 중 300등 정도랄까. 이대로는 안되겠다, 조직을 혁신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노무라증권의 ‘퀵 영(Quick Young) 전략’을 벤치마킹했죠. 직원 수를 50명에서 25명 선으로 줄이되, 30세 전후의 패기만만한 젊은이들로 영업 진용을 따로 짰습니다. 억지로 구조조정 한 건 아니었고 다른 지점으로 보냈어요. 당시는 영업직원 수가 많아야 실적 올리기가 쉬웠기 때문에 지점들이 대형화를 선호하던 때였습니다.”
1993년, 박회장이 이끄는 동원증권 중앙지점은 연간 1조1400억원의 주식약정을 올려 마침내 전국 1위 지점이 된다. 그의 전략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동원증권은 IMF 이전에 직원 수를 1800명에서 800명으로 줄였습니다. 외환 위기가 오기 전에 구조조정을 끝낸 거죠. 또 인센티브제를 가장 먼저 도입한 증권사이기도 합니다. 그런 경영진의 결정에 제가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고도 할 수 있겠죠.”
1993년 말 박회장은 한 외국계 증권사로부터 연봉 10억원에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솔직히 마음이 흔들렸어요.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니었죠. 하지만 제 꿈은 존경받는 경영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돈 욕심에 외국 회사로 옮겨갔다가는 더 큰 것을 잃을 수도 있다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거절했죠.”
공부 많이 시켰던 33세 지점장 동원증권 영업부 나상채 부장(45)은 중앙지점 시절 박회장 밑에서 일을 배웠다. 당시 박회장 밑에 있던 사람 중 상당수가 미래에셋 임직원이 돼 있어 객관적 평가를 듣기 위해서는 외부 인사가 좋겠다는 생각에 그를 찾았다. 박회장은 어떤 상사였을까. 나부장은 “뭔가 쇼킹하고 나쁜 얘기를 해줘야 될 것 같은데 그럴 만한 게 없다”며 입을 열었다.
“박회장은 나보다 한 살이 적었지만 배울 점이 많은 상사였습니다. 적극적이었고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자신이 먼저 치고 나가며 직원들이 따라올 수 있도록 유도하는 형이랄까요. 잠잘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일이 많았지만 1등이라는 자부심 때문에 힘든 줄도 몰랐습니다. 강제로 집에 못 가게 한 것이 아니고 연구 과제를 많이 줬기 때문에 그걸 다 마치려면 밤 10시, 11시까지 사무실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예를 들어 ‘금융실명제’가 화제다, 그러면 그와 관련한 과제를 줘요. 보고서를 쓰게 하고 자료도 만들게 했죠. 그렇게 업무 외의 공부를 많이 시켰는데 두고두고 큰 도움이 됐습니다.
추진력이 강하고 카리스마가 있어 사람에 따라서는 권위적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고 봐요. 하지만 대다수 직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나눌 줄 아는 사람, 인생을 맡겨도 좋을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회의 때도 보면 자기 의견을 먼저 말하기 보다 직원들 얘기부터 들어요. 또 회사에서 개인 실적에 따라 포상금을 주잖아요. 그럼 혼자 갖지 않고 직원들에게 골고루 나눠줬습니다. 덕분에 모든 직원이 해외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죠.
함께 기관 영업을 나가 보면 뛰어난 언변으로 상대편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아버립니다. 임원이 한 10명쯤 둘러앉아 있어도 떠는 법이 없어요. 설득력이 뛰어나 그의 말이라면 거부감 없이 믿게 되죠. 어…, 또 하나 기억나는 건 회사 돌아가는 사정을 잘 말해줬다는 겁니다. 보통 지점장들이 그런 말은 잘 안 하죠. 근데 박회장은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공유하는 편이었습니다.
투자에 관해서라면 시류 분석과 기회 포착이 탁월했습니다. 그냥 운이 좋은 게 아니예요. 하다못해 골프 회원권 하나를 팔아도 최고의 수익을 올렸으니까요. 이재에 대해서는 박회장 만한 사람 찾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예를 들어 시장이 잘 안 풀릴 것 같다, 그럼 영업을 확 줄입니다. 직원 피해와 고객 피해를 막기 위해서죠. 사실 실적이 무엇보다 중요한 게 지점인데 그러기가 쉽지 않거든요. 돈 들고 찾아온 고객을 “지금은 위험하니 나중에 투자하시라”며 등 떠밀어 내보내야 하니까요. 여하튼 그런 흐름을 기막히게 잘 탔습니다. 배짱도 있었고요.”
나부장은 중앙지점의 지점훈(支店訓)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돌리는 방법은 앞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카네기 어록의 한 구절이다. |
박 회장이 미래에셋 창업 10주년을 기념해 『돈은 아름다운 꽃이다』(김영사 출판)라는 책을 곧 펴냈다. 이 책에서 박 회장은 돈에 대한 철학과 투자원칙, 성공담과 함께 실패담 등을 담담하게 풀어나간다. 아울러 미래에셋의 지나온 10년의 성장 과정을 설명하고 향후 10년간 나아갈 길을 제시한다. 부의 사회환원에 대한 진솔한 생각과 한국 금융산업의 발전 방향 등에 대한 의견도 피력한다. 미래에셋 관계자는 “회장이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기 위해 책을 펴내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박 회장은 현재 한국 증권시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힌다. 그는 국내 최초의 뮤추얼펀드 판매, 토종 해외펀드 개발 등 아무도 밟은 적이 없는 길을 걸어왔다. 투자자들의 호응은 폭발적이다. 올 들어 펀드시장에 유입되는 자금의 절반가량이 미래에셋에 집중될 정도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투자자들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당연하다. 기대가 큰 만큼 그의 어깨는 항상 무겁다.
박 회장은 이 책에서 돈을 버는 것보다 어떻게 쓰느냐에 더욱 고민하고 있음을 내비쳤다. 그는 “3~4년 후부터 미래에셋에서 받는 배당금 전액을 젊은 금융인재를 키우는 사업에 사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미래에셋은 이미 글로벌 금융 전문가 육성을 위해 해마다 20여 명의 인재를 뽑아 아무 조건 없이 1인당 최대 5만 달러까지 지원하고 있다. 3~4년 후에는 선발 인원을 100명으로 늘릴 계획이다. 그는 “인재를 양성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가장 뛰어난 투자”라는 지론을 갖고 있다.
박 회장은 이 책의 첫머리를 병상에 있는 어머니 얘기로 시작한다. 그는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어머니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가 사석에서 털어놓은 일화 한 토막. “대학에 입학하자 어머니께서 1년 학비와 생활비를 부쳐주셨어요. 돈 관리하는 법을 배우라는 뜻이었죠. 한번은 몇 달 지나지 않아 이 돈을 모두 써버렸어요. 결국 다시 손을 내밀었더니, 어머니께서 차용증을 쓰라고 하시더군요. 이자와 함께. 연말에 원금과 이자를 모두 갚았습니다. 이자 무서운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그는 책에서 자신의 통찰력은 독서에서 나왔다고 밝혔다. 그는 현상 너머에 있는 진실을 꿰뚫어볼 수 있어야 1급 투자자가 될 수 있다고 늘 강조해왔다. 그는 “그런 능력은 독서에서 얻었다”며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독서”라고 단언한다. 박 회장은 경영서적보다는 역사와 미래예측 서적을 좋아한다. 대학 때 박 회장은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을 19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그의 투자원칙인 ▶소수의 입장에서 따져볼 것 ▶균형감각을 갖고 시장을 냉정하게 바라볼 것 ▶기본에 충실할 것 등도 독서의 힘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말한다. “다수를 따라가면 편하지만 큰 수익은 기대할 수 없다”고. 코스피지수가 2000포인트를 넘었던 지난달 25일 박 회장은 기자에게 “지금은 낙관론이 너무 지배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우려를 표명했다. 마치 곧이어 닥칠 주가 급락을 예언한 듯했다. 그러나 최근 외국인들의 파상적 매도로 주가가 폭락하자, 거꾸로 과감하게 주식을 사들이는 모습을 보였다. 외국인들이 1조원어치 이상의 주식을 순매도한 지난 16일 미래에셋은 5000억원어치의 주실을 순매수했다. 모두가 불안에 떨고 있을 때 박 회장은 “증시의 밸류에이션 측면에 문제가 없다. 크게 걱정할 상황이 아니다”며 자신 있게 매수에 나선 것이다.
오늘의 박 회장이 있기까지는 부단한 학습과 연구, 그리고 고민과 실천의 연속이었다. 그는 고려대학 재학 때부터 주식을 연구하고 투자하는 데 심취했다.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1985년 그는 27세의 나이에 사설 투자회사인 내외증권연구소를 서울 회현동에 열었다. 증권사 직원들이 사무실에서 고스톱을 치던 때 그는 기업ㆍ경제 분석 보고서를 쓰는 데 땀을 흘렸다. 증권사 객장에 있는 시세 전광판이 온통 파란 불(하락)일 때 그는 있는 돈을 끌어 모아 우량주식을 샀다. 또 98년 초 외환위기 여파로 금리가 연 30%를 넘볼 때 그는 미래에셋의 운용자금 200억원을 채권에 투입, 큰 수익을 올렸다. 98년 12월 뮤추얼펀드가 허용됐을 때 대다수 증권사는 생소한 이 상품에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었지만, 박 회장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국내 최초 뮤추얼펀드인 ‘박현주 펀드’ 시리즈를 내놓아 대히트를 쳤다.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박현주 펀드는 99년 승승장구했지만, 2000년의 IT버블 붕괴와 함께 주가가 급락세로 돌아서면서 펀드 가치가 급속히 쪼그라들었다. 많이 팔린 펀드였던 만큼 투자자들의 원성도 컸다. 이를 계기로 박 회장은 선진 금융시장에 대한 연구와 해외 진출의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한다. 그는 곧바로 미국 유학을 결심하고 캘리포니아로 떠났다.
하지만 당시 증시에선 묘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박 회장이 벤처주식 투자를 통해 정치인들의 자금을 불려주는 역할을 했고 검찰 조사가 예상돼 도피성 외유에 나섰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는 뜬소문에 불과했던 것으로 확인됐고, 그는 명예를 회복했다. 엉뚱한 소문 때문에 괴로운 나날이었지만, 박 회장의 2년간 미국 생활은 그와 미래에셋이 역경을 딛고 일어나 다시 도약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됐다. 미국에서의 연구와 경험을 통해 그는 글로벌 금융그룹으로서의 미래에셋 청사진을 완성한 뒤 2002년 말 귀국했다. 그는 곧바로 홍콩과 싱가포르의 인력을 채용해 현지법인 설립을 준비했다. 아울러 중국과 인도 시장 등을 겨냥한 토종 해외펀드를 계획했다. 박 회장은 “미래에셋의 꿈은 금융의 삼성전자다. 삼성전자가 세계 최고의 제품을 수출하듯이 우리도 금융상품을 갖고 글로벌 무대로 진출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박 회장은 이번에 펴낸 책에서 “외환위기는 후진 금융에서 비롯됐다”며 “한국이 선진 금융체제를 이루지 못하면 외환위기와 같은 상황은 언제든지 다시 찾아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 그는 “국민소득 3만 달러는 금융산업 발전을 통해서만 달성할 수 있는 목표”라고 힘주어 말했다.
박현주 회장은
1958년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나 광주일고와 고려대학을 졸업했다. 동양증권과 동원증권을 거쳐 97년 미래에셋을 창업했다. 동원증권에서 그는 국내 증시사상 최연소 지점장으로 발탁돼 전국 1위의 영업실적을 올려 유명세를 떨쳤다. 창업 10년 만에 미래에셋은 국내 최대 규모의 자산운용사를 보유하게 됐다. 아울러 생보사 인수를 통해 미래에셋을 금융그룹으로 성장시켰다. 그는 탁월한 승부사다. “기회는 늘 위기의 얼굴로 찾아온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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