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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연구회

재계의 풍운아 박연차회장(1945~2020)스토리

by mo516 2021. 7. 19.

재계의 풍운아 박연차 회장(1945~2020)

박회장의 지병 소식이 알려진 것은 2019 말이었다. 폐암 말기로 생명이 위독하다는 얘기가 돌았다. 베트남에서 귀국, 삼성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박회장은 결국 2020 131일 치료하던 삼성병원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말았다.

 

박회장에 대한 공과는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느 창업 회장과 마찬가지로 무에서 유를 일군 자수성가형 사업가였다. 박회장은 1945 11월 경남 밀양의 산골짜기 마을에서 51녀중 넷째로 태어났다. 당시 시골 생활이 다 그렇듯 박회장은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기회가 온 것은 월남 파병이었다. 1966년 월남에 파병돼 44개월을 보냈다. 당시 파병은 어려운 일반 사병에게는 한몫을 쥘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파병 시절 사업에 눈을 떴다. 미군들의 생활을 보면서 자본이 우위라는 것을 인식했다.

 

귀국후 사업을 시작했다. 1971년 ‘경일산업’을 창업, 사업의 길로 들어섰다.1980년 ‘태광실업’으로 개명하기 전까지 사용했던 회사 명이었다. 사업 초기 그렇게 잘 나갔던 것은 아니었다. 부도에 몰리는 등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기회가 찾아 온 것은 1987년 나이키와 전략적 사업 파트너를 맺으면서 였다. 당시 신발산업은 대한민국이 세계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고 있었다. 마침 ‘88서울올림픽’을 앞둔 시기였기도 했다. 태광실업은 나이키 신발을 생산하면서 순풍에 돛을 달았다.

국내 임금이 치솟자 박회장은 베트남행을 결정했다. 당시만해도 많은 제조업이 중국으로 눈을 돌릴 때였다. 박회장은 월남전에 참전했던 기억을 떠올려 베트남 호치민으로 공장을 옮기는 모험을 강행했다. 베트남에서의 박회장은 독보적인 위치에 올랐다. 베트남과 한국의 민간 외교관으로서의 역할도 충분히 수행했다.

사업도 일취월장이었다. 2006년엔 정밀화학 회사인 휴켐스를 인수, 사업 다각화를 꽤했다. 태광실업은 신발산업에서 화학, 정밀소재, 전력, 레저에 이르는 종합그룹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2019년 기준 15개 법인에 10만여명의 임직원과 매출액은 38천억원에 이르렀다. 박회장은 단순한 외형만 확장 한 것이 아니었다. 2018년 포브스 집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개인재산 7위에 링크됐다. 개인 재산이 무려 32억달러에 달했다. 이는 SK 최태원 회장이나 롯데 신동빈회장보다 개인재산이 많은 수치다.

 

박회장이 이렇게 까지 성장하는 배경에 노무현 전 대통령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노전대통령과의 인연은 노전대통령의 형인 노건평씨가 있었다. 노건평씨는 당시 세무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박회장이 1971년 김해에서 사업을 시작할 때 그곳에 건평씨가 근무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연은 노전대통령으로까지 이어진다.

노전대통령이 1988년 부산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할 때 건평씨의 땅을 사주면서 노 전대통령을 간접 지원한다. 이를 계기로 노전대통령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다.

2002년 대선때는 건평씨의 별장을 10억원에 매입해주면서 더욱 관계가 돈독해진다.

노전대통령 재임기간 태광실업은 더욱 날개를 단다. 2005년 태광실업이 보유하고 있던 김해시 동방유량 공장 부지가 고도제한이 완화되면서 무려 350억원의 시세차익을 거둔다. 베트남에서 발전사업을 수주하기도 하는등 그야말로 태광실업은 승승장구했다. 2007 11월 노전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 당시 서기장에게 박회장은 자기 친구라고 소개한 일화는 지금도 회자될 정도다 박회장의 사돈인 김정복씨를 중부지방국세청장에 이어 나중에는 국가보훈처장에 임명되기까지 한다.

 

이렇게 돈독한 관계는 노 전대통령이 퇴임 뒤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노대통령이 퇴임후 봉화마을에 대통령집무실 기록물200만여건을 복사해 30억상당의 제2의 청와대시스템 이지원(e-知園)”을 구축하여 여론이 악화되었다. 특히 이기록물은 국가기밀에 포함될 수 도 영향력도 행사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악화된 여론을 기화로 노대통령의 주변, 이른바 ‘박연차 스캔들’이 시작된 것이다. 박회장은 노 전대통령에게 자금을 지원한 것을 검찰에서 거침없이 진술했다. 이는 노전대통령이 타개함으로써 영원히 묻히고 말았다. 그러나 박회장은 뇌물수수 등 혐의로 26개월의 실형을 선고 받고 만기출소 한 뒤 사업에만 몰두했다.

그런 그가 75세를 일기로 한많은 인생을 마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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