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前총리의 5.16군사정변 당시상황 회고 인터뷰
◎김종필 전 총리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의치 때문에 발음에 불명확하다”고 양해를 구하면서도 일인다역을 하듯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그대로 옮기며 3시간 동안 1961년 5월 16일과 그 전후의 긴박했던 상황을 설명했다
때로는 격정이 밀려 오는 듯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5.16 바로 전날 오전 9시쯤 김종필 중령은 부인 박영옥 씨의 배웅을 받으며 "마지막 될지 모르는" 길을 나선다. "청파동 집에서 나오는데, 그 사람이 울지도 않아요. 하도 기가 막히는지. 집사람이 심부름을 잘했어요. 동지들 만나는데 연락 같은 것을 해주곤 했죠. 그때 집 사람이 임신 일곱달째예요. 배가 이렇게 나왔는데, 내가 그랬거든. 신의 가호가 있으면 또 만나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총살된 아주 볼품없는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오늘 저녁 실패하면 다시 살아서 만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마음이 놓인다. 당신 배속에 있는 놈이, 자고로 유복자는 사내라고 하니, 남자일 거다, 네 아버지가 허투루 죽지 않았다, 긍지를 갖도록 잘 키워라. 그리고는 배를 좀 만지다가 나왔죠. 그 사람이 잘 울지도 못해요. 멍하니 있어요. 우리 집이 숙명여대 정문 앞인데, 밑에 철길 있는 곳까지 내가 내려오니까 그때야 그 사람이 길 한복판에 서서 울고 있어요." 또 김 중령은 5·16 기본계획을 혼자 만들었다고 했다. "누구한테 보여줄 사람도 없었어요. 같이할 사람도 없었지만 조심하느라 그렇기도 했지요. 밤늦게 쓰고 나면 마누라에게 남기지 말고 태우라고 했어요."
― '5·16' 전날 밤, 박정희 소장과 김종필 중령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박 소장의 신당동 댁에 있었어요. 혁명공약을 마지막으로 손보다가 저녁 11시가 좀 넘어 내가 '갑시다, 사전에 들통이 나서 6관구 사령부에서 상당한 혼란이 있소, 그러나 30사단·33사단·제2해병여단 전부 예정대로 한강 인도교로 향하고 있으니 박 소장은 6관구에 가서 정리를 해주시죠, 저는 필요한 것을 전부 인쇄할 테니 내일 아침 5시에 광명인쇄소 앞에서 만나죠, 방송국에 같이 가십시다' 했죠. 박 소장의 지프를 같이 탔어요. 뒤에는 한웅진 준장과 내가 탔지요. 화신상회 옆에서 나는 내리고 박 소장과 한 준장은 영등포 쪽 6관구로 갔어요
― 나중에 신민당 유진산 당수의 사무실이 그 광명인쇄소 옆에 있었죠.
"직원들이 인쇄 준비를 하고 기다리더군요. 내가 그랬죠. '권총을 들이대고 협박 공갈을 해서 마음이 내키지도 않은데 인쇄를 했다고 하시오.'직원들이 20명쯤 있었는데, 원고를 턱 내주니까 '혁명공약? 혁명취지문?' 읽더니 얼굴들이 하얘져요.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고요."
― 인쇄는 무사히 마쳤군요?
"나는 2층에서 바깥을 경계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경찰관 2명이 화신상회 쪽에서 올라와요. '어? 뭔데 이 시간에 불 켜고 인쇄하나 잠깐 들어가 보자', '사고도 아닌데 뭐 들어갈 필요가 있어?' 하면서 둘이 옥신각신해요. 인쇄소 안에 이낙선 김용태 이학수(인쇄소 사장) 등이 함께 있었는데, 나하고 이낙선이 권총을 갖고 있었어요. 내가 속으로 빌었어요. '도리 없다, 당신들이 들어오면 쏠 수밖에 없다, 제발 그냥 가달라.' 그런데 정말 그냥 가더군요."
―'5·16'을 3개월 앞두고 정군(整軍)운동 끝에 예편했는데 박정희 소장과는 언제
혁명에 대한 첫 교감을 가졌습니까?
"군복 벗고 집에 가니(1961.2.15) 슬프데요. 이걸로 내 군 생활이 끝나는구나. 이틀 후 대구로 박 소장(2군 부사령관)을 만나러 갔어요. 송요찬 육참총장 등 13명이 옷 벗고 있다, 나도 옷 벗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군운동만 갖고는 안 되겠다고 했더니 박 소장이 피식 웃어요. 그렇게 될 수도 있을 거야 하면서요. 박 소장은 이미 만군 출신 장군들을 만나고 있었던 겁니다. 여차하면 들고 일어나자는 겁니다. 내가 '서울에서는 조직을 상당히 했습니다' 했더니, '어 조직을 하고 있었어? 어디서?'하고 물어요. 30사단, 33사단, 그리고 서울에서 제일 가까운 6군단, 육군본부, 1군 사령부 내 동기생들과 상당히 깊숙이 얘기되고 있다고 하자, 아무 말 않고 조심하라고도 않고 '으음 알았어' 하더군요. 며칠 후 박 소장이 서울로 올라왔어요."
― 박소장이'혁명 지도자'로 결정된 건 언젭니까?
"동지들이 지도자는 누구냐고 자꾸 물어요. 아직 밝힐 수 없다, 때가 되면 여러분 모인 자리에 오실 거다, 지금은 모호한 상태로 놔둬라, 했죠. 9기생 강상욱 중령의 장인이 소유한 5층 건물이 충무로에 있었는데, 옥상에 29명이 모였어요. 거기에 박 소장을 모시고 가서 궁금하던 그분이 바로 이분이다, 했죠. 그게 1961년 4월 7일입니다.박 소장이 본격적 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날이에요."
― 다른 지도자는요?
"처음엔 박병권 장군도 논의됐는데, 그분은 군대 내 족청(조선민족청년단) 지도자였어요. 당시 서울에 와있던 미 CIA의 크레퍼(가명) 대령이 족청과 먼저 손을 잡았어요. 또 장도영 장군과도 접촉했고요. 장 장군은 우리와도 관계가 있으니까 태도가 애매할 수밖에 없었죠. 우습게 됐어요. 혁명에 대해 장 장군은 이래도 괜찮고 저래도 괜찮게 계산한 흔적이 있어요."
― 박병권 장군에게도 제안했습니까?
"아니요. 그분은 크레퍼하고 접촉했는데 족청도 움직임이 상당히 활발했어요."
― 그들은 어떤 방향이었습니까?
"뒤집는 쪽이었지요."
― 장도영 장군과는 5·16 전에 어떤 관계였습니까?
"혁명을 한다고 하니까 '계획서가 있느냐'면서 박 소장에게 달라고 하더래요. 내가 만든 게 있긴 있었습니다. 그러나 '뭘 믿고 주느냐, 그러다 일망타진된다' 하고 반대했어요. 박 소장이 '장 장군과 나는 남이 모를 만큼 깊은 사이야, 날 믿고 줘' 해요. 하는 수 없이 드렸죠. 그러면서 '3일 후에 반환받아 주십시오' 했는데 결국 끝끝내 내 손에 다시 돌아 오지 않았어요."
― 무슨 내용인데요?
"혁명이니 뭐니 자극적인 어휘는 안 들어가고 대신 혁명 후의 정부 조직 같은 것이 만들어져 있었죠. 계획서는 경제개발을 위주로 했어요. 장면 정부와 다른 점은 경제기획위원회를 중심으로 정부 조직을 만들었어요. 나중에 경제기획원이 됐죠. 또 국민운동본부도 있었는데 이것은 새마을운동으로 발전됐고 그리고 중앙정보부가 있었어요. 이것들이 주요 골자요."
― 5·16은 쿠데타입니까, 혁명입니까?
"학자들은 쿠데타는 같은 세력끼리 뒤엎는 것이고, 레볼루션(혁명)은 밑에 있는 세력이 위를 뒤엎는 것이라고 하는데 결과적으로는 같은 것이라고 봅니다. 5·16을 폄하하기 위해 쿠데타라고 하는데 나는 그때도 그랬어요, 쿠데타건 레볼루션이건 우리나라를 근원적으로 변혁하고 발전시켰으니 아무래도 상관없다."
― 거사 정보가 미리 새나간 경우는 없었나요?
"정보는 난무하고 있었어요. 누가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한다는 이야기가 제멋대로 돌아다니고 있었으니까. 족청이다, 박병권이다, 미국이다, 아무개다, 하도 많이 돌아다니니까 놔두었어요. 무슨 소문이 나면, 믿을 수 있는 거야 그거? 그저 돌아다니는 소리 아니야? 지들이 들고일어나면 어떡헐 텨? 뭐 그런 취급을 받았어요."
― 군사혁명 때는 인쇄, 요인 체포, 중요기관 접수 같은 절차가 있을 텐데, 어디서 배웠습니까?
"매뉴얼은 없고, 이집트혁명(1952년) 때 나세르가 나기브와 함께 정부를 장악하고, 나중에는 나기브를 쫓아내잖아요. 내가 그 과정을 소상히 알고 있었어요. 또 케말 파샤(1923년 청년 장교들과 함께 터키 혁명을 일으킴)에 관한 것도 뽑아서 읽었죠."
― 5·16의 핵심은 박정희입니까 김종필입니까?
"핵심은 박정희 대통령입니다. 나는 돕는 일을 한다, 내가 군복을 벗을 때도 그런 심정으로 벗었던 것이고요."
― 박정희는 떠받들어졌다, 실제로 5·16을 기획하고 집행하고 성사시킨 사람은 김종필이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중앙 일은 네가 해라, 박 대통령이 그랬어요, 서울은 네가 맡아라, 네가 주가 되라, 나머지 외곽은 내가 하마, 이미 손써놨다, 이것이 합쳐진 것이지요."
― 5·16 직전 청파동 집은 안전했나요?
"전날 헌병대가 불시에 찾아왔어요. 내가 가지고 있는 여러 계획 서류를 압수하려고. 나는 밖에서 혁명동지들을 만나고 있어서 몰랐어요. 우리 집사람이 서류를 천장에다 감추려 했는데, 사다리가 없으니까 뭘 놓고 올라갔다 떨어지고 올라 갔다 떨어지고…. 밖에서는 헌병들이 막 문을 두드리고 있고요. 겨우 올려놓고 문 열어줬지."
― 헌병들이 못 찾아냈군요?
"형식적으로 찾는 척 했대요. 그때 분위기가 그랬어요. '(군사혁명 하는데) 방해되는 일은 하지 말자'고 무언중에 그랬어요."
― 김종필 중령이 만든 혁명공약을 박정희 소장은 손 안 댔습니까?
"초안 그대로 글자 하나 고치지 않았어요. 나중에 하나 추가됐는데, 제6항입니다.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한다는 내용 말입니다. 난 내키지 않았지만 박 대통령이 버마식 군부 통치를 염두에 둔 것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였어요. 군부가 물러났다가 민간정부가 시원치 않으면 다시 나오는 게 버마식이거든."
― 5·16 당일과 이튿날 포고령 14호까지 쏟아냈는데 요점이 뭡니까?
"혁명을 기정사실화하자는 거예요. 가령 포고령 4호는 정권 인수, 국회 해산, 정당사회단체 정치활동 금지 같은 걸 담고 있는데, 혁명위원회가 의결한 것도 아니야. 내가 포고령을 호주머니에 넣고 있다가 하나씩 발표한 것이지. 정권이 혁명 세력에게 다 넘어갔구나 하고 국민이나 미국이 믿게 만들려는 것이었지."
― 5·16 당일 박정희소장을 처음 만난 곳이 어딥니까?
"통금 해제시간인 새벽 5시 혁명공약 인쇄를 마치고 나자 박 소장이 왔어요. 굉장히 흥분된 상태였습니다. '장도영이가 헌병 시켜서 나를 쐈어, 나를 쐈어' 하는 거예요. 나도 이미 인도교에서 헌병 저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 나중에 장도영 계엄사령관을 미국으로 쫓아냈는데, 그 후로 만난 적 있습니까?
"단 한 번도 없어. 박 대통령도 미국 갔을 때 못 만났다고 해. 어딘가 살아 있겠지. 죽었단 얘기 못 들었으니까."
― 장면 총리 체포조는 누구였습니까?
"박종규 소령이 지휘하는 GDT(특수부대)팀이 총리 체포조가 됐는데, 그들이 선두에 오니까 헌병들이 풍비박산된 거죠. 장면은 반도호텔에서 수도원으로 도망가고 없고, 체포조는 호텔 앞에서 공중에 들이대고 공포를 쐈어요. 나는 광명인 쇄소에서 그 소릴 듣고 교전이 벌어진 줄 알았어요."
― 그날 육군본부 회의 상황이 험악했죠?
"우리들이 들어가 시위를 했어요. 일부러 무서운 표정을 짓고, '동조 안하면 재미없다. 우리는 죽을 각오로 나섰는데 당신들은 적당한 소리나 하고 있다' 그랬더니 '찬성, 찬성, 찬성' 이래요."
― 한 사람씩 호명했습니까?
"여럿이 앉아 있는데 의견을 얘기하도록 했지요. 6군단장, 육사교장, 그리고 육군본부 일반참모, 특별참모들…. 우리는 금방 일이라도 낼 것 같은 표정으로 있었지요."
― 5·16 사흘 후 미8군에 가서 사령관을 만났지요?
"5월 18일 8군 사령관의 정보장교인 몰 대위가 찾아왔어요. 다음 날 오전 10시 카터 매그루더 사령관이 날 만나자 한다 그래요. 그런데 군복 벗고 평복으로 와달라는 겁니다. 육군 대장이 육군 중령을 만나서 얘기하면 계급이 영향을 줄 것 같다고요. 내가 '배려 고맙다' 하고 이튿날 갔어요. 매그루더 장군이 체구가 큰데 암체어에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나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그래요. '내 지휘하에 있는 부대를 맘대로 끌고 가서 뭐를 했다고? 혁명을 해? 마이어협정 위반이다'고 소리를 질러요."
― 그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큰 사람이 소리 지르면서 왔다 갔다 하니까 울 안에 큰 곰이 돌아다니는 것 같더군요. '그런 소리 하려고 오라 했냐. 말 다 했냐. 돌아가겠다' 하고 일어서는데, 가이 멜로이 부사령관이 '얘기가 본론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어디 가느냐'고 앉혀요. 근데 매그루더가 또 '전방부대 즉각 원대 복귀시켜라'고 해요. 내가 그랬어요. '매그루더 장군 좀 지나칩니다. 당신 휘하 부대를 빼내면서 무슨 부대가 몇 날 몇 시에 혁명한다고 신고하고 하는 그런 혁명이 어디 있느냐.'
매그루더가 날 한참 쳐다보더니 웃어요. '어, 그 말은 맞다' 하면서요."
― 상황이 역전됐군요.
"당신이 혁명을 인정 안 하면 내가 여기 있을 이유가 없다고 했지. 그랬더니 또 웃어요. 매그루더가 '혁명 인정하고 휘하부대 복귀하는 문제는 내일 계속 협의하고 오늘은 이걸로 끝내자' 그래요. 다음날 두 번째 만나서 혁명 인정, 전방부대 복귀, 주요 인사 협의, 부대위치 이동 때 유엔사 동의, 미국의 대한(對韓) 지원 등 5개항에 합의했어요. 돌아올 때 박정희 소장에게 보고했더니 만족스러운 표정과 함께 '수고했어' 하더군요. 23일 박 소장도 매그루더를 만났고, 25일 서울·워싱턴에서 공동성명이 나온 겁니다."
― 언제쯤 '5·16이 성공했구나' 느꼈습니까?
"5월 18일 사관생도들이 혁명 지지 행진을 했을 때, 그리고 5월 23일 박·매그루더 합의가 이뤄진 때였습니다."
― 거사 전에 세력을 규합할 땐 어디서 만났습니까?
"서울 청계천에 있는 술집인데 이름이 '상수'였어요. 우리 아지트겸 연락처였지. '상수'를 거꾸로 읽으면 '수상'이 되는데, 우리들은 당시 신발 벗어 유엔 단상을 때리던 '후르시초프 소련 수상'을 거기에 빗댔지. '후르시초프 6시' 하고 말하면 상수에서 6시에 만나잔 소리야."
― 모이면 분위기가 어땠습니까?
"내가 '혁명한다. 가담할래?' 하니까 다들 '다시 말해봐 임마' 그래요. '혁명한다. 장면 정부는 안 된다. 같이 할래?못하겠다면 비밀만 지켜달라' 했지. 그러니까 내 손을 꼭 잡고 '야, 나를 빼면 되니' 하는 거야. 그때 장교들의 열정이 내 가슴을 두드리는 것 같았어. 더 들을 필요도 없어."
― 김종필 중령은 조직력과 재산은 물론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쳤다는 의미에서 '나는 혁명의 아버지였다'고 훗날 자부 했다던데, 지금도 '5·16은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런 어리석은 소리 한 적 없어요."
―혁명 후에 중앙정보부장은 왜 맡았습니까?
"혁명을 뒷받침하는 임무를 수행할 놈은 나밖에 없다는 생각이었어요. 나중에 반드시 보복 당할 가능성이 큰데, 내가 당하겠다는 것이었지요."
― 실제 5·16 후 공격을 당했죠?
"최고의원 중에 상당수가 군대 이외에는 발붙일 데가 없는 사람들이에요. 내가 이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도대체 비례대표가 뭔지도 묻지 않고, '그런 것을 우리가 왜 하냐. 김종필 너 혼자 다 하냐'고 집단이 돼 가지고 날 공격하는 거야. 참 안타까웁디다. 그냥 덤비는데 내가 할 말이 없었어. 하지만 나중에는 다들 국회의원 됐어."
― 지금은 청구동에 살고, 5·16 때는 청파동에 사셨죠?
'청'자 붙은 동네를 좋아하셨습니까?
"사람들이 나더러 청구동을 청와대 만들려고 한다고 그랬어요."
― 찬스가 여러 번 있었잖습니까?
"별로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어요. 뒷받침하는 일을 해야겠다, 악역을 내가 맡겠다, 그런 생각뿐이었습니다."
― 박정희 대통령도 그런 생각이 있었나요?
"박 대통령은 생각이 한 서너 번 바뀌었어요. 그러나 남에게 부담되지 않는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겠다는 일념은 계속됐어요. 지금 아랍 나라들을 보세요. 30~40년 (장기집권) 하니까 절딴 나고 있잖아요. 모두들 한계를 알아야 하는데 욕심이 앞을 가리니까 그런 결심을 못 하나 봐요."
― 지난날 박정희대통령에게 마음속으로 섭섭한 것 없었습니까?
"나도 인간이니까 섭섭한 것 많지요. 예를 들어 내가 만든 정보국 요원들이 와서 우리 집 네 귀퉁이에서 24시간 감시를 해요. 내가 참다못해 박 대통령에게 가서 '각하 저를 의심하십니까. 제가 나세르고 각하가 나기브다,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까' 하고 소리를 질렀죠. '제가 반역할 것으로 봅니까. 무슨 감시를 시킵니까. 섭섭합니다' 했죠. 박 대통령이 험한 얼굴로 나를 이렇게 보다가 조금 풀어지더니 '어이 뭐 그럴 수도 있지 뭐…' 하는 거예요. …허허허."
(※1952년 이집트혁명 때 자유장교단의 리더였던 자말 나세르는 무하마드 나기브 장군을 영입하고, 1953년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이후 복잡한 과정을 거쳐 나기브가 물러나고 1956년 나세르가 대통령이 됐다. 김 전 총리는 박 대통령에게 그걸 오해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 박 대통령이 거짓말을 한 건 아니네요. 둘러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래요, 그분은 솔직하잖아요."
― 5·16 때부터 박 대통령이 김 전 총리를 어떻게 불렀습니까?
"지금까지 라디오나 TV를 보면'종필아―' 그랬다는데, 이름 그대로 부르는 일은 절대 없었어요.
당의장, 의장 같은 직책이나 '임자' 이렇게 불렀지."
― 우리 전통에도 조카사위한테 말 놓는 법은 없었지요.
"그래요. 그런데 방송에서 '어이 종필이' 한단 말이야. 에이 고약한…."
― 예의를 갖췄군요.
"개인적으로도 여러 가지가 있거든요. 그렇게 함부로 못했어요."
― 5·16 당일 군복 입고 다녔습니까?
"권총 차고 반(半)군복 입었지."
― 반군복이 뭡니까.
"계급장 뗀 군복이니까 반군복이오."
― 권총은요?
"콜트 45구경. 물통처럼 시꺼먼 권총 있어요."
― 젊은 장교들의 정군(整軍)운동이 5·16으로 귀결된 셈인데, 명분이 뭐였습니까?
"3·15 부정선거로 국가가 흔들렸어요. 4·19가 일어나고 학생들이 생명을 내걸었잖아요. 군인들도 적잖이 책임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을 내보내야 한다 해서 정군운동을 시작한 겁니다."
― 그 당시 장군들을 '똥별'이라고 불렀다면서요.
"정군 대상으로 추려진 장군들은 전쟁 중에도 공병들의 불도저·GMC(트럭)를 빼돌렸고, 전방 진지에서 소나무 베어 후방 제재소에 팔아먹고, 병사들 휴가 보내면서 또 빼먹고 그랬어요. 우리가 다 알거든요. 별을 달고 도대체 독도법(지도 읽는법)을 몰라요. 5만분의 1 지도에서 간격이 몇 개면 거리가 얼마다 하는 것을 몰라요. 이런 사람들 전부 옷 벗고 나가라, 하는 것이 정군이에요. 그게 결국 혁명으로 이어진 것이죠."
― 정군운동을 하면 군 수사기관이 가만있었습니까?
"처음엔 CIC(방첩대)에 잡혀 갔어요. 이소동 방첩대장이 '그만큼 했으면 됐다. 그만하라'고 해요. 난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겠다'고 했어요. 그땐 분위기가 그랬어요. 내가 '나를 가둘 게 아니라 참모총장을 만나게 해달라' 했어요. 며칠 후 껌껌한 저녁에 송요찬 참모총장이 오라고 해요."
― 묶여서 갔습니까?
"아니요. 당당하게 군복 입고 갔지요. 연병장에는 동기생들이 모여들고 있었고요. 송 장군이 '도대체 나더러 뭘 어떻게 하라는 거냐' 물어요. '다 아실 텐데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그만두고 나가십시오' 했지."
― 중령이 중장에게 참….
"안색이 영 달라지데요. 한참 있더니, '나도 책임을 통감하고 있어. 그러나 갑자기 그만두라면 되나. 여유를 좀 줘야지. 나도 생각이 있어' 하는 거예요. 내가 '하루 이틀 자꾸 시간 끌면 결심이 흐려져 안 됩니다. 오늘 결심하시죠' 했어요. '2·3일 여유를 줄 수 없나. 내 자네들 요구를 들어줄게' 하더군요. 안 된다고 했어요. 결국 그 다음 날 사표 냈어요."
― 왜 유독 송 장군이었나요?
"이유가 있었어요. 3·15 선거 때 송 장군이 1군 사령관이었는데, 선거가 끝나고 육군본부에 들어서서 당당하게 큰소리로 '1군 산하에서는 110% 달성했어' 하는 겁니다. 아주 완벽을 기했다는 거지. 110%가 말이 됩니까."
― 3·15 부정이 어느 정도였는데요?
"방첩대가 주로 한 짓인데, 천장에 붓두껍을 매달아 놓고 찍었거든. 병사의 손이 야당 후보로 향하는지 여당으로 향하는지 알 수 있단 말이야. 야당 쪽으로 가면 웬 놈이 붓두껍을 매단 위에서 뭐라고 하는 겁니다. 여당 쪽 찍으라는 거지요. 전원 찬성표로 미리 찍어놓고 따로 투표를 시킨 다음, 그 투표지는 몰래 다 태워버리기도 했어요."
― 김종필 중령도 송 장군과 함께 전역했습니까?
"아니요. 참모총장이 먼저 나가고 나는 방첩대에서 석방됐는데, 해가 바뀌어 헌병대에서
나를 또 잡아갔어요. 정월달이라 엄청 추운데 다 떨어진 모포 2장만 줘요. 그 담요에 허연 이들이 왔다갔다했어요. 이를 악물고 헌병감 만나게 해달라고 했지요. '나는 현역 장교다, 잘못이 있으면 군법회의에 회부해라' 그랬어요. 헌병감 조흥만 장군이 왔더군요. '별로 좋은 소식은 가져오지 못했다'면서 '수뇌부는 네가 혼자 하는 게 아니고, 네 뒤에 네가 존경하는 누가 있다고 알고 있는데, 그분에게 여파가 미치지 못하게끔 네가 옷 벗고 나가라' 그래요. 나는 '못하겠다' 버텼죠. 그랬더니 'CID(범죄수사대)에서 700명을 총동원해 박정희 장군의 뒤를 캘 것이다. 그분이 다시 당할 텐데 그래도 좋으냐' 그래요. 얼마 뒤 내가 헌병감을 만나서 '박 장군에게 부당한 일이 없을 것이란 보장을 해라. 내가 그만두겠다' 했죠. 헌병감이 '나를 믿어라' 그래요. 내가 옷을 벗은 것은 1961년 2월 15일이고, 정식 예편발령은 3월 15일에 났어요."
― 송 장군의 다음다음 후임이 장도영 장군이군요. 5·16 혁명공약도 그의 이름으로 발표되고요. 장 장군과 박정희 소장은 인연이 깊나요?
"나이는 박 대통령이 6살 위입니다. 그런데 장 장군이 박 대통령 보직을 봐 드렸어요. 9사단이 대구에서 창설될 때 첫 사단장이 장 장군이었는데, 그때도 박 대령을 참모장으로 데려갔어요."
― 5·16 직후 장 장군 명함이 많았죠?
"그분은 혁명에 대해서 불분명한 태도였는데도 호신(護身) 차원에서 직책을 5개나 가졌어요. 최고회의 의장, 내각 수반, 국방장관, 육참총장, 계엄사령관 등이에요. 자기가 하겠다니까 박 소장은 그냥 놔두었고요."
― 왜 장 장군을 몰아냈습니까?
"그때 군대 내 상당수가 이북 출신이었어요. 장 장군이 자꾸 이북 출신 장군들 포섭하고, 집에서 안 자고 서울 중앙청 총리집무실 옆 별실에 기거하면서 헌병 배치하고 그랬어요. 자기 주변에 세력들을 규합하고 있었죠. 박 소장이 신경 안 쓰는 사이에 장 장군은 최고회의 핵심들을 60%가량 손아귀에 넣고 군·행정부를 장악하고 있었어요. 안 되겠다, 이러다간 박 소장 결딴난다, 내 생각대로 해야겠다, 결심했죠."
― 어떻게 했습니까.
"중앙청으로 갔어요. 먼저 중앙정보부 요원 20여명이 헌병들을 제압했습니다. 그러고는 곧장 장 장군 사무실로 쳐들어갔어요. 그 앞에서 '죄송합니다. 댁에 동행해야 하겠습니다' 했죠. 그런데 장 장군이 앉아 있다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왜 이제 왔어?' 그래요. 그게 1961년 7월 2일밤 11시쯤입니다. 약식 군법회의도 형식적으로 거치고, 미국에 가기를 희망하니까 미국으로 보내
주었습니다."
― 박 대통령도 알았습니까.
"보고 안 하고 했습니다. 박 부의장이 놀라 가지고 '왜 그렇게 했어?'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혁명을 수행하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내가 다 책임지겠습니다' 했죠. 그 후 박 부의장이 최고회의 의장이 됐습니다."
― 피 흘리는 무력 충돌은 어떻게 피했습니까?
"일이 되려고 했던 거지요. 의정부에서 서울 가는 길목에 미 1군단 헌병들이 6명씩 보초를 서고 있어요. 의정부 방면에서 6군단 포병들이 중포(重砲)로 무장하고 새벽에 서울로 들어가는데 그들이 저지하면 큰일인 거예요. 내가 그랬죠. '무술하는 병사를 10명쯤 스리쿼터(4분의 3t트럭) 에 싣고 선두에 세워라. 미군 헌병들이 막으면 그들을 스리쿼터에 납치해서 데리고 와라. 절대 총 쏘면 안 된다.' 근데 막상 초소 앞을 지날 때는 훈련 가는 것으로 알았던지 통과 수신호를 해주어서 무사히 서울까지 들어올 수 있었어요. 무슨 일이든지 일이 되려면 그래요."
― 5·16은 일생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6·25 때도 5·16 때도 모두 생명을 내던지고 일을 했어요. 나중에 무슨 비난이 오건 말건 이건 해놓아야겠다 하는 것이 5·16이었습니다. 한일회담도 그랬어요. 요즘 서울 남산공원을 천천히 걸으면서 '요행히 그런 고비들을 넘어왔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제 나도 늙었나 봅니다. 5·16이란 6·25전쟁에서 살아남은 젊은 장교들이 나라를 위해 두 번째로 죽음을 각오하고 덤볐던, 어떤 의미에서 숭고했던 순간이에요."
― '김종필 전 총리'하면 일반 국민에겐 '영원한 2인자'라는 인상이 깊습니다.
본인은 일인자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이유가 뭐라고 보십니까. 일부러 비켜간 것입니까.
"박 대통령이 일을 제대로 하려면 정말로 자기희생을 무릅쓰고 도와드리는 사람이 있어야겠다 생각했어요. 나는 그런 자세로 시종일관 도와드렸어요. 그 이상 다른 거 하려고 안 했어."
― 5·16을 비판적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지만 서울대 전상인 교수는 "5·16 이후
18년은 장기적으로, 그리고 결과적으로 '한국의 근대화 혁명'을 성취한 과정이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50년을 맞아 본인은 어떤 평가를 하시겠습니까?
"5·16에 참가했던 사람으로서 평가를 한다는 것은 옳지 않아요. 다만 우리는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불사르고자 했다는 점은 말하겠습니다. 그때 우리나라엔 근대화라는 말 자체도 없었어요. 우리가 '민족중흥'과 '조국 근대화'라는 말을 처음 쓴 것입니다. 5·16은 조국 근대화의 출발점이 됐습니다. 그리고 18년 동안 근대화의 기조(基調)를 닦을 수 있었습니다. 최빈국에서 경제대국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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